제주살이/기억하고 싶은 풍경

오백나한....슬픈 바위의 전설

수지인 2023. 2. 24. 15:37

 


 

슬픈 바위의 전설이 서린 ‘오백나한’

 

설문대 할망은 설문대 하르방과 혼인을 했는데 아들 500을 낳았다. 대 흉년이 든 해였다. 대식구에다 먹는 것이 엄청나 끼니를 대기가 어려웠다. 할망이 아들들을 데리고 양식을 구하러 간 사이 설문대 하르방은 남은 양식을 다 털어 죽을 쑤기 시작했다. 큰 가마솥 주위를 돌며 죽을 젓다가 발을 헛디뎌 하르방은 가마솥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온종일 양식을 구하러 돌아다니느라 배가 고프고 지친 아들들은 죽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허겁지겁 퍼먹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아들이 가마솥 바닥에 남은 죽을 뜨려고 보니 뼈가 보였다. 건져보니 사람의 뼈였다. 두개골도 나왔다. 그제야 아버지가 죽 속에 빠져 죽은 것을 알고 막내는 형들을 원망하며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에 가서 며칠을 슬피 울다가 거기서 바위가 되어버렸다. 이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한다. 한편 바위가 된 동생을 본 형들도 큰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다가 한라산 영실에서 모두 바위가 되니 이를 오백장군이라고 한다.

 

 


영실(靈室)

영실(靈室)의 ‘실’은 골짜기의 옛말로서 室(실)이라는 한자를 빌어 표기하고 있으며, 영실이란 산신령이 사는 골짜기 즉 신령스러운 곳이란 뜻이라고 한다.

아득한 옛날 한 어머니가 아들 5백을 낳아 이 한라산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식구는 많은 데다 집이 가난하고 마침 흉년까지 겹치니 끼니를 이어가기가 힘들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 와야 죽이라도 끓여 먹고 살 게 아니냐≫고 타일렀다. 오백 형제가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큰 가마솥에다 불을 때고 솥전위을 걸어 돌아다니며 죽을 저었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디디어 어머니는 죽솥에 빠져 죽어 버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백형제는 돌아와서 죽을 먹기 시작했다. 여늬 때보다 죽이 맛이 좋았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동생이 죽을 뜨려고 솥을 젓다가 이상하게도 뼈다귀를 발견했다.

다시 잘 저으며 살펴보니 사람의 뼈다귀임이 틀림없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빠져 죽었음이 틀림없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불효의 형들과 같이 있을 수가 없다.≫ 동생은 이렇게 통탄하며 멀리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 (遮歸島)으로 달려가 한없이 울다가 그만 바위가 되어버렸다. 이것을 본 형들도 그제야 사실을 알고 여기저기 늘어서서 한없이 통곡하다가 모두 바위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니 영실에는 499봉이 있는 셈이고 차귀섬에 막내동생 하나가 떨어져 나와 있는 셈이다. 차귀섬의 오백장군은 대정읍의 바굼지오름(簞山)에서 훤히 보인다.

어느 해였든가, 어떤 지관(地官)이 바굼지오름에서 묏자리를 보게 되었다. 지관은 정자리를 하나 고르고는 ≪이 묏자리는 좋긴 좋은데 차귀섬의 오백장군이 보이는 게 하나 흠이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상제는 ≪묏자리만 좋으면 그것쯤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고 차귀섬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곧 도끼로 그 바위를 찍기 시작했으나 워낙 큰 바위라 없애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귀섬의 오백장군에는 도끼로 찍어 턱이 진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이 바위가 되며 흘린 피눈물은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가 봄이 되면 철쭉 꽃으로 피어나 온산을 붉게 물들인다.

설문대 하르방과 아들들을 모두 잃어버린 설문대 할망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옛날부터 한라산 등반길에서 큰소리를 지르면 갑자기 안개가 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는데 이는 설문대 할망이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설문대할망

 

4백리 절해고도 제주도, 돌이 많고 땅이 척박해 곡식은 안되고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지붕이 날아가며 며칠만 가뭄이 들어도 사람들이 굶어 죽던 유배의 섬, 그러면서도 경관만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기구한 섬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옛사람들은 가난했지만 거대하고 당당한 여신 ‘설문대’가 이 섬을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설문대는 어느 날 망망대해 가운데 제주섬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치마폭에 가득 흙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찢어진 치마 구멍 사이로는 끊임없이 흙 부스러기들이 떨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한라산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졌다. 치마폭 사이로 떨어진 흙들은 군데군데 모여 나즈막한 오름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산을 만들다 보니 너무 높아 봉우리를 꺾어 던졌더니 안덕면 사계리로 떨어져 산방산이 되었다.

설문대는 얼마나 거구였던지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제주시 앞 관탈섬에 걸쳐졌다. 빨래할 때면 손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문지르며 빨았다. 또 한라산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오른쪽 다리는 서귀포 앞바다 지귀섬에 디디고 왼쪽 다리는 관탈섬에 디뎌 우도를 빨래판으로 삼아 빨래를 하기도 했다.

가난한 여인 설문대는 속옷이 없이 제주 백성들에게 "속옷을 한 벌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마"하고 약속했다.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명주를 모았으나 아흔아홉 동밖에 모을 수 없어 속옷을 지어주는 데 실패했다. 결국, 제주는 섬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때 설문대가 다리를 놓던 흔적이 조천읍 조천리와 신촌리 바닷가에 바위섬들로 남아 있다.

외로운 설문대에게도 배필이 생겼다. 역시 허우대가 큰 "설문대 하르방"이었다. 두 거구가 사노라니 작은 섬에 먹을 게 없어 노상 걱정이었다.

하루는 둘이 합심하여 물고기를 잡아먹기로 했다. 설문대 할망은 치마를 벗고 성산읍 신양리 ‘섭지코지’ 앞바다에 들어앉고 하르방은 우도 쪽으로부터 고기 몰이를 했다.

하르방이 거대한 물건을 꺼내 바다를 휘휘 저으니 놀란 고기떼들이 섶지코지쪽으로 도망가다가 다리를 벌리고 앉은 설문대 할망의 하문(下門) 속으로 들어가 잡혀 그날의 요깃거리가 됐다. 이런 연유로 섶지코지는 ‘설문대 코지’라고 불리게 됐다.

몸집이 크니 정력이라고 떨어질 리 없었다. 우도는 원래 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었다고 한다. 설문대할망이 성산읍 오조리 식산봉과 성산리 일출봉에 양다리를 걸치고 앉아 오줌을 싸자 육지가 패이며 바다가 그 사이로 들어와 섬이 생겼다.

얼마나 오줌 줄기가 셌는지 바다가 깊이 패여 성산과 우도 사이 바다는 물살이 유난히 빠르다. 요즘도 배들이 이 부근에서 난파당하면 거센 조류에 밀려 일본의 대마도까지 흘러가기 일쑤다.

설문대 부부에게는 오백 명의 건장한 아들들이 있었다. 모두 한라산 누비며 사냥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설문대 할망은 아들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고 있었다. 5백 명에게 먹일 죽이라서 엄청나게 큰 솥에서 끓일 수밖에 없었다. 할망은 솥 전에 올라서 가래로 죽을 젓다가 발을 헛디뎌 뜨거운 죽 속에 빠지고 말았다.

저녁에 돌아온 형제들은 잘 익은 죽을 먹으며 "오늘은 유난히 맛있다"고 아우성이었는데 막내아들만은 어머니가 안보이자 이상해 죽을 먹지 않았다. 형제들이 죽을 다 먹고 나자 밑바닥에 사람 뼈가 나왔다.

그때서야 형제들은 어머니가 죽을 쑤다가 솥에 빠져 죽은 것을 알게 됐다. "어머니의 살을 먹은 형제들과는 같이 살 수 없다" 이렇게 외치고는 막내아들은 서귀포 삼매봉 앞바다로 내려가서 슬피 울다가 "외돌개"가 됐다. 나머지 형제들은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오백장군"이 되었다.

한라산 영실기암에는 설문대 할망의 죽음에 얽힌 이런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막내가 따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말로는 "오백장군"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바위가 4백 99개밖에 안 된다고 한다.[자료출처:서홍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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