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폰카산책

정릉貞陵과 흥천사興天寺 탐방

수지인 2021. 4. 24. 20:25

 

某兄!

코로나 확진자가 또 다시 800명대로 늘어나는 바람에 사진약속도 미루어야 했소.

당분간 자제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유로워질 거라 믿었는데…….

매년 열흘 남짓 외국 여행하는 재미로 1년을 버티며 살았는데 나이는 먹어가고 이대로 발이 묶여 살다가 끝나는 게 아닌지…….

오늘은 주말이어서 전철여행도 접고 아침겸 점심을 먹고 집에서 1키로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조선왕조 태조(이성계)비 신덕왕후 능인 정릉(貞陵)과 능침 사찰인 흥천사(興天寺)를 탐방했소.

이곳은 집에서 가까워 수시로 찾았지만

전에는 가벼운 산책목적이었다면 이번에 꼼꼼히 살펴 소개를 목적으로 한 점이 다르오.

이유는 자네도 여기에 한번 와보길 권하고 싶고, 정릉과 흥천사에 대해 기본 지식을 갖고 오면 좋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라오.

 

우선 정릉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겠소.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96)의 능이다.

향처(鄕妻 ·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京妻 ·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 풍습에 따라 그녀는 태조의 경처가 됐다. 향처 한씨가 조선 건국 전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조선 최초의 왕비 자리는 자연스럽게 강씨에게로 돌아갔다.

 

정릉(貞陵)은 사적 제208,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산역을 시작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에 자리를 정하게 되었다. 능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진 것은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태상왕이 사망한 뒤 1409(태종 9) 2월에 도성 안에 능이 있다는 이유로 도성밖 현재의 자리에 옮겼고, 묘를 사흘한(沙乙閑)곡에 이장했다가 다시 한강 남쪽 공현(鞏縣)의 뒤에 이장하여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가을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선조때 정릉 복권을 논할 때 정릉을 찾으러 아차산으로 사람을 보냈다가 변계량의 춘정집에 정릉을 이장한 축문에 국도동북이라는 문구를 보고난 이후 정릉을 찾았다.)

 

신덕왕후는 이후 260여년이 지난 현종 10(1669)에야 비로소 왕비로 추존돼 종묘에 배향된다.

이때 정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이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 ·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로써 이 해 9월 강씨의 기신제가 811일로 고정되어 200여년 만에 복구 되었다. 그리고 추진 기구인 부묘도감에서 예조와 함께 시호 제정을 발의하여 순원현경(順元顯敬)으로 정하였다. 시호는 순원현경신덕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이고,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소생으로 왕자 이방번(李芳蕃), 이방석(李芳碩)과 경순공주(慶順公主)를 두었다.

 

 

 

 

정릉 매표소 앞 정릉과 흥천사 간단설명

 

 

 

정릉 안내도와 설명문

 

 

 

조산왕릉 세계문화유산 인증 표시석과 입구 풍경

 

 

 

능침 건너편 산책로에서 본 정릉(능침은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음)

 

 

 

능침,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산책로

 

 

 

 

 

 

 

 

 

 

 

 

 

 

 

 

 

 

 

 

 

 

 

 

 

 

 

재실(齋室)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하였다.

 

 

 

 

 

 

 

 

 

 

 

 

 

 

흥천사(興天寺)

성북구 흥천사길29(돈암2595번지)

 

흥천사는 지금의 정동에 조선 태조 6(1397) 태조비 신덕왕후의 능침사찰로 창건되었다.

연산군 10(1504) 흥천사는 사리전만 남기고 화재로 전소되었고, 사리전도 6년 뒤인 중종 5(1510) 불타버렸다.

불타버린 흥천사는 한동안 공지로 남아있었고, 중종이 흥천사 부지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사는 것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기록상 확실하게 중창되는 것은 1576년 인근의 신흥암을 능침사찰로 지정하면서이다. 하지만 이 암자가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1669년 함취정 터로 절을 옮겨 짓고 신흥사라 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1794년 성민, 경산, 경신 승려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현종 15(1849) 적조암(寂照庵)이 창건되었다. 고종 2(1865)에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대방과 요사를 짓고 중창한 뒤 다시 흥천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과 5~6년 전까지만해도 전혀 관리가 안되어 안타까웠는데 주지스님이 바뀌면서 활발한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어 훌륭한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오늘도 불사는 그치지않고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른듯 보여 금년 부처님오신날에는 새로운 사찰의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노전과 삼감선원 - 한옥으로 아름답레 지어진 사찰 부속 건출물

 

 

 

독성각과 북극전 가는 길

 

 

 

명부전(우측)과 불상

 

 

 

신축 건물(종무소와 신도 공간)

 

 

 

흥천사 대방(興天寺 大房) 국가등록문화재 제583호 1865년(고종2) 1865년 흥선대원군이 직접 시주하고 모연하여 조선의 새로운 부흥을 꿈꾸며 직접 현판까지 적었던 전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도에는 본전인 법당 정면에 누각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흥천사에는 본전인 극락보전 앞에 누각 대신 대방(큰방)이있다. 이는 조선시대 왕실의 원찰인 능찰(겓刹)에서 보이는 가람배치도이다. 대방은 H자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였으며, 전면은 겹처마의 2익공(翼工)집이고, 측면과 후면은 민도리집으로 구성하였으며, 전면양끝에 누마루가 돌출되어 있다. 평면 구성을 보면, 몸체에 해당하는 중앙부 가운데는 대방 8칸이 있고, 그 앞뒤에 퇴칸이 놓여 마루를 구성하며, 대방의 좌측에4칸 크기의 부엌이 있고, 우측에는 작은 방과 헛간이 달려 있다. 따라서 누각과 방사와 법당과 숙소 및 부엌의 기능까지 합친 종합적인 다용도의 공간으로 실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의 건립 시기는 사중에 보관 중인 현판 기문(京畿右道楊州牧地三角山興天寺寮舍重創記文)을 근거로 고종 2년에 중창된 것으로 판단한다.

 

 

 

흥천사 극락보전(興天寺 極갪寶殿)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6호 1853년(철종4) 조선 태조가 신덕왕후의 원찰로 창건한 흥천사의 극락보전은 서방 극락세계에서 설법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봉안한 법당이다. 철종 4년(1853)에 구봉 계장(九峰啓壯) 스님이 건축하였다. 규모는 정면 3칸·측면 3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인 다포양식 건물이다. 돌층계를 정면에 두고 기둥은 창방과 평방으로 결구하고 기둥 사이에도 전·후면에서는 각 2구, 측면에서는 각 1구의 공간포를 두었다. 정면 3칸에는 꽃살 창호를 달고 좌·우 뒷면은 판벽이다. 내부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가운데 우물천정을 두었다. 문에는 화려한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 두 기둥 위에 돌출 되어있는 용머리 장식이 특징이다. 이 극락보전의 구조와 형태는 조선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19세기 사찰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목조 건축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에서는 희귀한 사찰 건축이므로 매우 귀중하게 평가받고 있다.

 

 

 

종각(전면 작은 건물)과 대방

 

 

 

대방 전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