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ign travel/Spain

스페인-포르투칼-모로코 여행 #10-스페인 타리파에서 미하스까지

수지인 2014. 2. 5. 20:00

  스페인 타리파에서 미하스까지

 

 

 드디어 스페인 타리파항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기전 출입국관리소와 10세기경에 건설한 구스만성(Castillo de Guzmán)을 담았다.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와 건축물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의 첫 인상으로부터 모로코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출입극관리소에서 입국절차를 기다리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성채 망루처럼 보이는 구조물도 중세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데 무엇인지는 알려면 다시 다녀와야 될성 싶다.

 

간단한 입국신고를 마치고 스페인과 포르투칼 여행을 안내할 가이드 Steve Kim(한국명 김춘배)씨와 미팅 전세버스에 오른다.

젊고 패기에 넘쳐보이며 입가에 웃음을 띤 첫 인상이 무척 좋아 보인다.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이민 왔서 스페인에서 대학까지 나와 열심히 사는 한 아이의 아빠란다.

 

차창에 스치는 타리파 시가 풍경

 

 

 

에스파냐 / 스페인[Spain,España]


유럽의 남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나라이다. 많은 소왕국들이 8세기 초부터 이슬람 세력에 지배당하다가 이슬람으로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 성공함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졌다.


정식명칭은 '에스타도 에스파뇰'(Estado Espanol)이며, 영어명은 '스페인왕국'(Kingdom of Spain)이다.

유럽대륙의 서쪽 끝인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다. 서쪽으로 포르투갈, 북쪽으로 프랑스에 접하고, 남쪽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마주하며 동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비스케이만(灣), 북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한다.

국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레아레스 제도(諸島), 카나리아 제도에 흩어져 있다. 모로코 북부에도 에스파냐령(領)인 세우타, 멜리야 및 모로코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3개의 작은 섬인 차파리나스(Chafarinas), 페논데알우세마스(Penon de Alhucemas), 페논데벨레스델라고메라(Penon de Velez de la Gomera)가 있다.

행정구역은 17개주(comunidad autonoma), 2개 해외 자치시(ciudad autonoma)인 세우타, 멜리야로 구성되어 있다.

 

1. 자연  
에스파냐는 좁은 연안 저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메세타(Meseta:에스파냐어로 고원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메세타는 서쪽으로 기울어진 대지이기 때문에 두에로강·타호강·과달키비르강 등 주요 하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많다. 예외적으로 비스케이만에 인접한 칸타브리아산맥에서 발원한 에브로강은 피레네산맥 남쪽 기슭의 아라곤 저지(低地)를 남동방향으로 흘러 하구에 커다란 삼각주를 만든다.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은 해발고도 3,000m를 넘는 험준한 산지이며, 비스케이만(Bay of Biscay)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칸타브리아(Cordillera Cantabria)산맥은 그보다 낮아 해발고도는 2,000m 전후이다. 메세타의 남쪽 가장자리에는 시에라모레나(Sierra Morena)와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의 두 산맥이 각각 동서로 나란히 달린다.
기후는 대체로 여름에 건조상태가 심한 지중해성 기후이지만 국지적으로는 대서양의 영향을 받는 곳도 있다. 북서부와 칸타브리아산맥, 피레네산맥일대에서는 비교적 비가 많아 연간 강수량이 1,500mm를 넘는 곳도 있지만, 레온 지방과 지중해 쪽의 무르시아 지방은 강수량이 적어 연간 400mm 이하이다. 내륙지방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여 국지적으로는 스텝 또는 사막과 같은 경관을 나타낸다.
이에 비하여 북동부의 카탈루냐 지방은 이탈리아, 프랑스의 리비에라 지방의 기후와 비슷하며 해안은 겨울에도 비교적 온난하다. 건조한 기후조건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생에 부적당하여 민둥산과 척박한 다갈색 토양이 주를 이루며 북부의 산지에서만 삼림을 볼 수 있다. 전국토 중 경지는 11%, 초원은 18%, 산림지대는 56%이다.

 

2. 주민  
에스파냐는 인종적·문화적으로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진 복합체이다. 원주민은 지중해 인종에 속하는 이베리아족(族)이지만 기원 전에 남해안과 동해안을 따라 들어온 페니키아인(人)·그리스인에 의하여 식민개척이 이루어졌고, 북부에서는 피레네를 넘어 켈트인이 들어왔다. 이베리아족은 BC 3,000년경부터 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북부의 갈리시아 지방 등의 켈트적 요소는 지금도 강하다. 그후 로마인에 이어 반달, 서(西)고트 등의 게르만 민족이 들어왔으며, 이슬람 세력이 확대되자 아랍인과 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이 침입하여 복잡한 혼혈이 이루어졌다.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인면에서 에스파냐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동양적·아프리카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은 800년간에 걸친 이슬람 지배의 영향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에스파냐인은 키가 작고 눈동자와 머리칼이 검으며 피부는 백인 치고는 어두운 빛깔이다. 그러나 여러 민족의 침입과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레콩키스타) 등 역사적 특성으로 인해 지역차가 크다. 가령 북부와 동해안에서는 켈트계(系)와 북방계의 인종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에스파냐어(語)는 로마 식민지 시대에 들어온 라틴어가 속어화한 것으로,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을 포함한 메세타와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의 카스티야 방언(方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란(Catalan) 방언, 북서부의 갈리시아(Galicia) 방언으로 대별된다. 갈리시아 방언은 포르투갈어에 가깝고 카탈루냐 방언은 프로방스어의 영향이 강하다. 에스파냐어의 표준어는 정치적 중심인 마드리드의 카스티야 방언이다. 소수민족으로는 피레네 산중의 바스크(Basco)족(族)이 있는데, 바스크어는 이베리아반도 원주민인 이베리아족의 영향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스파냐는 열렬한 가톨릭의 나라이다. 에스파냐인의 99%는 국교인 가톨릭의 유아세례를 받는데, 이렇게 가톨릭교가 에스파냐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은 국토회복운동이 가톨릭교의 힘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메세타에서 특히 현저하다. 가톨릭교는 정신적인 지배자이며 거대한 부동산 소유자인 동시에 강력한 정치적 발언권을 가지고 있다. 에스파냐는 이슬람교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스파냐의 가톨릭교회는 가톨릭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며, 정치적으로는 우익 성향이고 사회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나 귀족 등 전근대적인 지배계층과 결합되어 있다.


3. 역사  
1) 선사시대
에스파냐의 이베리아반도에서 구석기시대의 인종으로 현재 확인되고 있는 최고(最古)의 인종은 크로마뇽인(人)으로 그들의 문화를 특징짓는 동굴회화(洞窟繪畵)가 많이 남아 있다. 산탄데르(Santander)의 서쪽에 있는 대표적인 알타미라 동굴회화는 BC 1만 5,000년 경의 것이며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회화와 함께 유명하다. 신석기시대는 적어도 BC 3,000년대에 시작되었다.
신석기 문화를 시작한 인종은 분명하지 않은데, 동일한 BC 3,000년대에 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하여 동부·남동부에 정착한 이베리아족이라는 주장이 있다. BC 2,000년 경에는 안달루시아에 타르테수스족이 이룩했다고 하는 동기문화(銅器文化)가 출현했으며, 훗날 청동기 제조도 이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BC 1000년경부터 수세기에 걸쳐 철기문화를 가진 켈트족이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와서 이베리아족과 혼혈하였으며, 갈색 피부, 검은 머리칼을 특징으로 하는 켈트이베리아족이 형성되어 에스파냐 민족의 중핵이 되었다.
2) 지중해 민족의 식민
기원전 10세기 경에는 고대 페니키아인이 카디스(cadiz)를 건설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인이 동부 해안에 식민시(植民市)인 암뿌리아스(Ampurias)를 건설하여 각각 교역활동을 하였다. 카르타고 세력도 기원전 6세기에 진출하여 바르키노(바르셀로나:Barcelona), 카르타고노바(카르타헤나:Cartagena)를 건설하고 교역을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에는 교역보다는 무력으로 타호강(Tajo river) 이남을 제압하였으며 그로 인해 아프리카 북해안을 비롯한 지중해에서 세력을 떨치고 로마 공화국의 해상활동과 대립하게 되었다.
3) 로마 지배와 게르만 침입
에스파냐는 BC 219년 로마의 동맹시(同盟市) 사군툼(현재의 지명은 사쿤토이며 발렌시아지방에 위치) 한니발이 거느리는 카르타고군(軍)의 공격을 받아, 지중해 무역권을 다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1)에 휘말리게 되었다. 로마는 소(小)스키피오의 지휘하에 BC 209년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에스파냐의 새 지배자가 되었으며, 로마의 지배와 수탈 그리고 도시 생활의 도입에 따라 부족국가의 오랜 정치·사회 제도는 해체되고 말았다.
언어도 공용어는 이베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바뀌어 오늘날 사용하는 에스파냐어의 근간을 이루었다. 종교적으로는 성(聖)바울로와 그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포교하였고,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2, 3세기에는 신도들의 조직체를 만들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에스파냐에도 영향을 미쳤다. 409년의 제1차 침입에 이어 414년에 침입한 서(西)고트족은 5세기 중엽에 이르러 에우리크의 지휘 아래 로마군과 먼저 온 게르만족들을 격파하여 서고트 왕국을 확립, 6세기 아타나길드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4) 이슬람의 지배
에스파냐 지역의 서고트 왕국은 서유럽 봉건제도의 확립을 위한 과도기에 종교·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한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으로 붕괴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 왕국도 노렸으나 732년의 푸아티에(Poitiers) 싸움에서 패배하여 이베리아 반도로 물러났으며, 그 이후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동안 산업은 발전되었으며 농업에서는 관개시설이 건설되고 목화·복숭아·사탕수수 등의 새 작물이 재배되었다. 수공업은 톨레도(Toledo)·그라나다(Granada)·알메리아(Almeria)·코르도바(Cordoba)에서 발달하였고 코르도바·세비야는 시장·수출항으로서 번창하였다.
이슬람의 문화·기술 수준이 당시의 서유럽을 능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10세기에 코르도바 도서관의 소장서적이 60만 권에 이르고, 그리스철학 연구도 상당수준이었으며 11세기에 제지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한 이슬람 정복의 ‘수평적’ 성격을 에스파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납·부역·인두세를 거두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이슬람군(軍) 조직유지가 피정복지에 행하여 '을 뿐 피정복민족 고유의 사회·정치·종교 체계에 대한 강제적 파괴와 재편은 행해지지 않았다.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도로부터 배교자(背敎者)라 불렸으나 자유민의 신분을 얻고 조세도 경감되었기 때문에 서고트 시대의 노예들이 많이 개종하였다. 그리스도교도는 모사라베스(Mozarabes)라 불렸으며, 공조(貢租) 등의 부담을 교환조건으로 하여 종전까지의 토지지배권, 교회의 유지, 서고트 관습법으로 운영되는 특별자치구의 형성을 승인받았다.
5) 국토회복운동시대
에스파냐의 중세는 이슬람으로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는 그리스도교도의 운동, 즉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북부산지를 어선으로 하여 이슬람 지배를 모면했던 아스투리아스(Asturias)·나바라(Navarra) 두 지방의 서고트 귀족은 8세기에 들어와 남하(南下)를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른, 회복운동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각지에 작은 왕국이 형성되었다. 이 운동은 단순히 군사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지역의 확대가 아닌 탈환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도의 정착·경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며, 이것 없이는 정복군의 전진기지 유지도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국왕과 귀족은 레온(Leon) 지방과 카스티야(Castilla) 지방을 중심으로 농민에게 이민 특허장(移民特許狀:cartas pueblas)의 교부와 베에트리아스(behetrias)의 승인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 위험부담이 큰 전선지대로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이민 특허장에 따라 농민은 토지 개간의 특권을 얻게 되었으며 영주의 자의적 부담도 피할 수 있었다. 베에트리아스는 도시에 주어진 특권으로 영주의 자유선택권을 내용으로 했기 때문에 영주의 무제한적 지배를 저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과 귀족의 관계도 서유럽 국가들과 같지 않았으며, 귀족이 정복하여 획득한 토지는 봉토(封土)가 아닌 군역(軍役)의 보수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하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해도 토지는 몰수되지 않았다. 이처럼 불완전한 장원 제도(莊園制)와 레엔 제도(봉토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가 에스파냐를 출발점으로 한 것은 중세의 특징이다. 또한 국토회복운동은 종교 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슬람의 종교적·문화적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필요성때문에 열광적 신앙이 육성되고 교회의 영향력이 비대해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6) 절대주의시대
14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1479년 아라곤(Aragon)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가 카스티야(Castilla) 여왕 이사벨(Isabel)을 아내로 맞이함에 따라 에스파냐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가톨릭 신자인 이들 두 왕이 1492년 에스파냐에 남아 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 국토회복운동이 종료되어 에스파냐는 절대주의시대에 접어들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는 이미 13세기부터 국왕이 반항적인 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귀족과 대립하는 사람 및 왕실재정 지지자를 도시대표로 만들었고, 코르테스(Cortes)라는 신분제 의회를 만들어 통치기관으로 삼고 있었다.
왕권의 도시대표와의 제휴 정책을 계승한 이들 두 왕은 신성도시동맹(神聖都市同盟 : Santa Hermandad)을 결성하였다. 동맹 도시에 재판권과 경찰권을 줌으로써 도시는 귀족을 대신하여 국왕의 군사력·경찰력의 중핵이 되었고 왕권에 충실한 시민 출신의 새 귀족층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두 왕은 또한 성채 파괴 등의 귀족억압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귀족을 부재지주화·궁정귀족화시키기 위하여 군인·관료로 임명하고 군사제도와 관료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따라서 15세기 말에 왕권은 강화되고 코르테스는 무력화하여 절대주의에의 길이 굳어졌다.
한편 이사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으로 에스파냐는 남북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독점하게 되었다. 16세기에는 멕시코와 페루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으며, 원주민의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은이 대량으로 에스파냐로 유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는 공업제품, 특히 모직물의 수출시장이 되었으므로 16세기 중엽에는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모직물공업이 번창하였다.
1516년 페르난도·이사벨 두 왕을 외조부모로 하는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로스 1세(독일 황제로는 카를 5세)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통치하에서 에스파냐 본국, 식민지, 독일의 합스부르크령(領), 네덜란드, 이탈리아령이 통괄되어 ‘태양이 지지 않는’ 에스파냐 제국이 출현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를 억압하였으며, 공동체적 권리 유지를 주장하고 왕권과 도시 상층부에 반대하는 시민반란을 1521년 진압하여 절대주의를 완성시켰다.
그 후 1556년부터 시작된 펠리프 2세 시대의 에스파냐는 ‘황금시대’를 맞이했으나 동시에 몰락의 원인을 잉태한 시기이기도 했다. 에스파냐의 위세는 신대륙(서인도) 무역의 독점 위에 구축되었고 그 무역의 기초는 모직물에 있었는데, 국내 모직물 공업이 길드(guild:중세 유럽의 동업자조합)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산업으로서의 발전이 억제되었다. 따라서 근세 농촌의 자유생산체제에서 발전한 네덜란드·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식민지의 은을 들여오는 단순한 경유지로 전락함에 따라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에스파냐는 부(富)가 집중되어 있는 네덜란드를 통제하여 세금 징수를 강화하였으나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독주에 도전하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하였다. 1588년에는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펠리프가 파견한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의 영국 해군에 의한 격파사건은 에스파냐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지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 후 30년전쟁(1618~48), 부르봉 왕조의 에스파냐 지배에 따른 에스파냐 계승전쟁(1701∼14) 등으로 신흥 해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번성하였고 에스파냐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적 쇠퇴기에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황금시대를 맞았는데 16세기 말부터는 세르반테스(Cervantes), 로페 데 베가(Lope Feliz de Vega Carpio) 등의 문학자, 엘 그레코(El Greco), 벨라스케스(Velasquez), 무리요(Murillo) 등의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7) 국내혼란과 왕정복고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에스파냐는 국가체제의 재건을 꾀하였다. 1759년에 즉위한 카를로스 3세 시절에 플로리다 블랑카(Florida Blanca) 백작을 비롯한 개화한 정치가들이 계몽전제주의적 관념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상주의(重商主義) 대신 경제자유주의가 추진되고 공업원료의 수입세가 철폐됨으로써 카탈루냐 지방에 미국산 원면(原綿)을 사용한 면직물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귀족 교회가 대토지를 소유하고 영세한 농민이 소작에 종사하는 농업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빈농(貧農)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채 조세(租稅)·봉건적 지대(地代) 등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것이 면직물 공업의 국내시장 확대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공업발전과 시민 계급의 성장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807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지배와 이에 협력한 귀족에 대한 저항은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국토의 회복과 동시에 반(反)봉건 투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1820년의 혁명은 리에고(Riego) 대위의 반란 선언으로 일어난 군대 반란에서 비롯된다. 반란은 각지 농민의 반봉건 투쟁과 결합, 1821년 봉건적 권리 폐지법안의 채택으로 시민혁명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국왕이 법안 비준을 거부하고 부르주아 계층이 합법적 개혁을 주장하며 농민운동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후 1830년대부터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을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카탈루냐의 공업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출신 바쿠닌(Bakunin)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소개되어 대토지 소유제 아래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을 자극, 1869년 카탈루냐·안달루시아에서 공화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난 데 이어 1873년에는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들의 운동은 공화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 공장·토지 점거로 확대되었다. 혁명 진압을 위해 부르주아지는 부득이 봉건세력과 동맹하게 되어 1875년에 알폰소 12세의 왕정복고가 실현되었다.
1876년의 헌법에는 입헌군주제와 제한선거제가 규정되었으나 필요에 따라 헌법을 정지시키는 권한이 정부에 부여되었으며 또한 카톨릭의 국교화를 규정하였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먼로주의의 영향 등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는 20년대에 태반이 독립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미국·에스파냐 전쟁의 패배에 따라 쿠바와 필리핀을 잃게 됨으로써 에스파냐 식민제국은 소멸하였으며 모로코와 아프리카의 일부만이 식민지로 남았다.
8) 제2공화국과 프랑코의 대부
1885년 알폰소 12세가 28세 나이로 죽자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1902년까지 섭정을 한다. 1902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알폰소 13세는 농업문제, 지방독립운동, 노동공세(攻勢) 등이 얽힌 만성적 사회·정치 위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독재(1923∼30)하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계공황에 따른 경제 악화로 군사독재와 함께 군주제마저 붕괴되었다. 1931년 4월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토지 귀족인 사모라 대통령과 공화주의자인 아사냐 총리가 이끄는 공화국으로는 민주정치 실현의 기초인 토지개혁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자주 반정부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정치불안을 이용하여 왕당파(王黨派)와 교권(敎權) 파시즘을 내세운 세다당(CEDA) 등이 득세하여 1933년에 우익 정권이 성립되었다. 1934년 10월 세다당원의 입각을 계기로 아스투리아스의 광산 노동자들이 혁명 코뮌을 결성하고 무력으로 맞섰으나 결국은 진압되었다. 이 후에 사회당 계통의 노동총동맹(UGT)과 아나키스트 계통의 전국노동연합(CNT)이 제휴하여 1936년 사모라 대신 아사냐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봉건 세력의 지지를 받은 군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내전(內戰)이 발발하였다. 반란군 지역에서는 전 독재자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결성한 팔랑헤당(黨)이 ‘협동국가주의’를 내걸고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1937년 4월에는 프랑코 장군의 주도 아래 ‘국가 셍디칼리스트 공격단, 전통주의자의 에스파냐 팔랑헤당’이라는 이름의 단일 국가정당으로 재편성되었다. 1939년 3월 프랑코 장군은 독일·이탈리아의 군사원조를 얻어 수도 마드리드를 제압하여 내전에서 승리하였다.[자료:두산대백과]

 

이 지역은 산도 많고 비교적 키가 큰 나무도 많이 보인다.

 

 

잘 단장된 국도

 

차창을 스치는 아름다운 집들

 

 

 

 

스페인의 경찰차는 이렇게 생겼더라.

 

 

부러 초점을 흐리게 찍었더니 또 다른 느낌이다.

 

잘 정비된 고속도로 교통시설물들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 그리고 하얀지들, 차창에 스치는 풍경들이 마치 슬라이드를 보는것 같다.

 

 

 

 

 

멀리 설산도 보인다.

 

석회암지대라서 산도 하얀 빛을 띠고 있다.

 

 

 

2014.01.20.

스페인 타리파에서 미하스로 이동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