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금요일)
바티칸시국(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대성당 -성베드로광장) -중식 -번츠투어(트레비분수 -스페인광장
-판테온신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캄피돌리오 광장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진실의 입-대전차경기장
-콜로세움)호텔(석식)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로마인들의 삶의 중심지, 로마인의 광장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로마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살던 중심이며 계속 발굴이 되고 있는 곳으로 사법, 정치, 종교 등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원로원, 로물루스 신전, 2개의 개선문 등 과거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기둥이나 초석만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곳에서는 원로원, 에트루리아 왕에게 대항한 로마 반역을 추모하기 위한 사원, 로마의 중심부로 쓰인 아우구스투스 개선문 외 많은 건물들의 잔해가 있다.
포로(Foro)라는 말은 ‘포럼(Forum)’, 즉 ‘아고라’와 같은 공공장소를 지칭한다. 주변으로 고대 로마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으나 4세기 말에 서고트 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캄피돌리오 광장을 나와 포로로마노 전경이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이어지는 길에 건물 벽에 붙은 이정표를 따라 전망대로 이동한다. 포로로마노 속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으나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니 전경을 보는데 만족해도 되겠다.
↓↓전망대에서 가장 가깝게 내려다 보이는 사투르노의 신전, 율리아의 공회당,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문, 공회당 건물.
아래 사진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기둥만 여덟 개 남아 있는데 것이 사투르노의 신전으로 기원전 497년에 세운 것이다.
↓↓사투르노의 신전
현재 기둥만 여덟 개 남아 있는데 기원전 497년에 세운 것이다.
↓↓원로원 건물
모든 정치적 암투가 벌어진 곳이다. 이 원로원 건물은 기원전 670년에 세워졌고 이후 계속 증개축되다가 303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테르미니 역 앞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을 만든 황제이기도 하다. 이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시기, 즉 기원전 510년~29년까지 가장 중요한 정치 의결 기구였다. 그 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 시대에 이르러 그 권한을 많이 축소했다.
↓↓안토니우스, 파우스티나 신전 그리고 멀리 콜로세움도 보인다.
↓↓카스트로폴록스 신전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2세기의 것이다. 이 황제의 아들이 카라칼라이다. 이 개선문은 기원후 203년에 만든 것으로 카라칼라가 상당히 잔혹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개선문이다. 이 개선문은 자신의 형제인 제타와 같이 만든 것이었지만 카라칼라는 황제에 오르기 위해 제타를 죽이고 그의 이름을 이 개선문에서 빼버렸다. 카라칼라는 잘 알다시피 카라칼라 공중 목욕탕을 만든 황제이다. 이 개선문 근처에 마메르틴 감옥소가 있는데 이곳에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감금되었다.
포룸 로마눔이 폐허가 된 원인
로마 제국이 망한 뒤 13세기께 로마는 인구가 1만 7천여 명에 불과한 초라한 도시가 됐다. 이때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서 로마로 소재지를 옮긴다. 교황은 로마를 화려하게 부활시켜 ‘교황이 사는 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교황은 수많은 성당을 지었는데, 건축가들은 필요한 자재를 따로 구하지 않고 포룸 로마눔에 있는 많은 건물들에서 뜯어내 조달했다. 르네상스 시대 대저택 건설에 몰두했던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포룸 로마눔은 거대한 채석장으로 변해버렸고 결국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이곳은 짧은 시간 안에 오늘날과 같은 폐허더미가 되어 버렸다. 또 하나의 이유는 건축자재인 대리석을 멀리서 조달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대리석의 특성상 막 채굴한 대리석은 약한데 반해 이 곳에 있는 대리석은 오랜 기간 동안 공기에 노출되어 충분히 단단해져 있기 때문에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건축자재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로마가 자랑하는 수많은 중세 이후 건물들은 결국 포룸 로마눔의 살을 뜯어먹고 만들어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