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금요일)
바티칸시국(바티칸 박물관-시스티나 예배당-바티칸 대성당-성베드로광장)-중식-번츠투어(트레비분수-스페인광장
-판테온신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로마시청광장, 청사-포로로마노-진실의 입-대전차경기장-콜로세움)
-호텔(석식)
성 베드로 성당 Basilica di San Pietro
바티칸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349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베드로 성인의묘지 위에 세운 것을 실베스트로 교황이 396년에 대성전으로 축성한 것이다.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극심한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그때마다 보수 작업을 했지만 원래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상갈로의줄리아노에게 성전의 재건축 계획을 세우도록 하여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깊은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고자 했다.
브라만테가 죽자 건축은 라파엘로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교황 레오 10세는 이것을 라파엘로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어 상갈로의 줄리아노와 베로나의 조콘도 수사에게 라파엘로를 도와 콘스탄티누스의 기념 성당 구조를 되도록 살리는 선에서 공사를 진행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1527년 란체스키를 중심으로 한 독일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사가 중단되었다. 공사는 1534년 바오로 3세가 즉위하면서 재개되었는데 상갈로의 안토니오가 주도했다.
1546년에 안토니오가 죽자 미켈란젤로가 이 공사를 이어받았다. 73세 고령이었던 미켈란젤로는 전임자였던 안토니오의 설계를 면밀히 분석한 끝에 크게 수정 보완했는데, 그의 설계도는 초기의 브라만테의 것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내부를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재조정하였고 돔을 현재의 모습대로 변경하였다. 돔은 이 성당의 꽃이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죽자 공사가 잠시 비판에 부딪치기도 했으나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605년 교황 바올로 5세가 등극했는데, 그는 성당이 옛 콘스탄티누스 기념 성당이 자리 잡고 있던 모든 지역을 포괄하기를 원했다.그 책임자로 등장한 예술가가 카를로 마테르노로, 마무리 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마테르노는 모든 면에 있어 미켈란젤로의 정신을 철저히 계승했다.
1629년에 마테르노가 죽자 신축 성당의 마무리 작업이 베르니니에게 맡겨졌다. 그는 성당의 내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성당의 바닥을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양쪽 회랑에 마련된 소성당(Capella)들의 장식을 붉
은색 기조의 천연 대리석으로 더욱 아름답게 했다. 천재적인 조각가 베르니니로 인해 성당은 완전한 예술작품이 되어 건축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물론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마테르노, 베르니니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혼이 융화를 이루어 만들어졌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마테르노의 정면
대성당의 정면은 마테르노의 설계안에 따라 1608년 공사를 시작해 1612년 7월에 마무리되었다.
정면의 높이는 45.44m, 너비는 114.69m이고, 여기에는 높이 27m, 직경 3m짜리 대리석 기둥 8개가 세워져 있다. 어지간한 궁전 못지않은 장려한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 규모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을 가리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건설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미켈란젤로의 돔은 대성당 정면을 제외한 로마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빈정거림이 끊이지 않아 왔으며, 프랑스의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정면 자체는 아름답지만 돔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성당 건물의 진짜 목적은 돔이었는데 그것이 가려지고 말았다”고 혹평했다.
↓↓현관 열주랑
길이 71m, 폭 13m, 높이 20m의 기다란 열주회랑으로 된 현관의 대리석 바닥에는 교황클레멘스 10세 성 요한23세 레오13세의 문장이 박혀있다.
↓↓성당 전면에 5개의 문이 있는데, 왼쪽부터 죽음의 문, 선악의 문, 중앙 문(필라레테문), 성사의 문, 성년의문이다.
아래 사진은 가장 우측에 있는 성년의 문인데, 높이 3.65m, 너비 2.30m 크기의 문이다. 1749년에 만든 나무 패널로 장식되어 있었으나 1949년 청동 패널로 교체한 것으로, 1950년 스위스 가톨릭교회가 기증했다. 원래는 100년마다 문을 열었으나 그 간격이 50년으로, 다시 25년으로 줄었다. 25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의 첫 날, 교황이 은 망치로 벽돌벽을 두들겨 이 문을 열고 순례자들이 출입할 수 있게 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것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자비의 희년을 기념하여 개문한 2015년 12월 8일이다.
↓↓아래 문은 중앙문(필라레테 문)이다.
현관의 다섯개 문 중 가운데에 있는 문이자 옛 대성당에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필라레테’라 불리던 피렌체 출신의 아베를리노에게 의뢰해 1445년 완성했다. 청동 패널에는 중세 때 널리 사용된 종교미술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베드로와 바오로를 찬미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성사의 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성당 출입에 사용하는 문으로 높이 7.43m, 너비 3.80m이다. 1965년 완성했으며 가톨릭의 성사(聖事, sacramentum)를 주제로 했다. 왼쪽 청동 패널에는 천사가 성사의 은총을 알리는 장면, 세례성사, 견진성사, 고해성사 장면이, 오른쪽 청동 패널에는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 성체성사, 혼인성사가 묘사되어 있다.
↓↓마테르노의 신랑
마테르노가 설계한 신랑은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보다 길이를 더 늘려 6만 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도록했다. 바닥에는 붉은색 원형 대리석이 박혀 있는데, 이는 800년 12월 24일 옛 대성당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를 나타내는 표시이다.
또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부터 미국의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31곳의 길이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교황의 제대와 발다키노 Baldacchino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 있는 교황의 제대는 오직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자리에는 본래 1123년 교황 갈리스토 2세가 축성한 제대가 있었으며, 지금의 제대는 1594년 6월 5일 교황 클레멘스 8세가 봉헌한 것이다.
교황 제대를 덮은 발다키노는 천개(天蓋)라고도 불리며, 교황 우르바노 8세가 20대 청년 베르니니에게 명해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에 걸쳐 청동을 주재료로 만든 후 금박을 입혀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걸작이다. 높이 29m, 무게 37톤에 달한다.
↓↓발다키노 천장의 성령을 상징하는 빋둘기가 그려져 있다.
↓↓돔 Cupola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설계한 돔이 기단부만 완성되는걸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설계안을 이어받은 자코모 델라포르타가 원안을 약간 수정해 1590년 완공했다. 돔의 내부 둘레에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는 마태복음 16장 18~19절이 2m 크기에 라틴어로 새겨져 있고, 채광 정탑 아래쪽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4세가 식스투스 5세를 기념한 ‘성 베드로의 영광을 위하여, 식스토 5세 교황, 교황 재위 제5년, 1590년’라는 라틴어 명문이 가장자리를 둘러 새겨져 있다. 돔 벽면에는 16개의 창문이 나있고, 돔의 이중벽 내부에는 537개의 계단이 있어서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채광 정탑으로 향할 수 있다.
↓↓성 베드로 의자
중앙 제대 뒷부분에 있는 성 베드로의 의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할 때 앉았던 나무 의자라는 전설이 있어 그 조각들을 모아 5세기에 상아로 장식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875년 서프랑크의 카를 2세(823~877)가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할 때 교황청에 기증한 의자이다.
베르니니는 교황 알렉산데르 7세(1559~1667)의 의뢰로 1647년부터 1653년까지 6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기존의 의자에 약 75톤에 달하는 청동을 입히고 금박과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했다.의자의 네 다리는 무게 39톤, 높이 5m에 육박하는 4개의 청동상이 잡고 서 있다. 이중 앞쪽의 두 사람은 서방 교회의 교부이고 뒤쪽 두 사람은 동방 교회의 교부이다.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을 의미함과 동시에, 서방 교회의 교부를 앞에 배치함으로써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드러낸다.
↓↓성가대 경당의 파이프오르간
성 베드로 대성당은 44개의 경당, 395개 조각품, 135개의 모자이크화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도 바티칸박물관에 버금가는 완벽한 미술관이다.
↓↓초대교황 베드로의 청동상. 발을 만지며 기도를 오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하도 만져서 달아졌다. 사진이 없어 자료사진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얼굴이 찍힌 수건과 성녀 베로니카상 - 중앙부 남서쪽에 위치해 있다.
↓↓교황 알렉산더 7세 기념비
교황 아렉산더 7세가 자신의 기념비를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만들어줄 것을 원해 70이 넘는 고령임에 불구하고 혼신을 다해 만든 마직막 작품이다.아래 붉은 대리석 속 모래시게를 들고있는 사람은 베르니니 자신의 자화상이다. 모래시계는 인생의 유한성을 그리고 뼈다귀로는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성 요셉 제대
원래 이 자리에는 귀도 레니가 그린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의 모자이크 복제화가 있었지만, 이것이 1822년 성 요셉 제대의 왼쪽에 있는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제대로 위치가 옮겨졌다. 지금 있는 성화는 1963년 축성한 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전세계 교회의 주보성인인 성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무릎을 꿇은 천사와 하늘에 떠있는 천사가 경배하는 내용이다.
제대 아래쪽에는 12사도 가운데 두 사람인 사도 시몬과 사도 유다 타대오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제대의 양 옆에는 각각 시몬과 유다 타대오의 원형 초상화가 모자이크화로 장식되어 있다.
↓↓거짓의 제대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땅을 팔아 생긴 돈을 하나님께 내지 않고 감추었는데, 아내인 사피라도 그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돈의 일부만을 사도 베드로에게 바쳤다. 베드로가“하나니아스, 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떼어 놓았소? 그 땅은 팔리기 전에도 그대 것이었고, 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그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 아니오? 그런데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소? 그대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이오.”라고 말하자 하나니아스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신을 메고 장사지내러 나간 사이,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사피라가 들어왔다. 베드로는 그녀에게도 돈이 이것뿐이냐고 물었고 그녀 역시 거짓말을 했다. 베드로는 “어쩌자고 그대들은 서로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것이오? 보시오, 그대의 남편을 묻은 이들이 바로 문 앞에 이르렀소. 그들이 당신도 메고 나갈 것이오.”라고 말했고, 사피라 또한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흔히 ‘횡령자의 최후’로 알려져 있다. 거짓 제대의 성화는 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비오 8세의 기념물이 있으며, 기념물 밑에는 성구소와 보물실(Sacristy and Treasury Museum)로 향하는 문이 자리하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구소 및 보물실을 연결하는 이 통로에는 대성당에 안장된 교황들의 명단이 있다.
↓↓변용의 제대
예수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기 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갔다. 제자들 앞에서 예수의 모습이 변해 얼굴과 옷이 눈부시게 빛나며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자,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라고 청했다. 하지만 빛나는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러자 제자들이 엎드려 두려워했다고 한다. 마태복음 17장 1~6절의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담은 변용의 제대의 성화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인 라파엘로의 유작으로, 1517년 작업에 착수해 그가 사망한 해인 1520년 제자들이 완성한 것을 1767년 모자이크화로 교체했다. 성화의 원본은 1797년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가져가 루브르에 전시되었다가, 1815년 파리 조약에 따라 바티칸으로 반환되었다.
제대 맞은편에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11세의 무덤이 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의 기념물
↓↓피에타 경당
오른쪽 측랑에 위치해 있다.
1499년 당시 24세였던 미켈란젤로가 교황청 주재 프랑스 대사 랑그로사이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조각한 <피에타>가 있다. ‘피에타’란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어로 ‘슬픔’이나 ‘비탄’을 뜻한다. 주로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이 묘사되는 작품을 피에타라고 하는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워낙 유명해 마치 대명사처럼 되었다.
자세히 보면 성모 마리아 얼굴이 예수보다 젊어 보이는데, 그 이유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순결한 여자들이 순결하지 않은 여자들보다 젊음을 더 잘 유지하는데, 티끌만큼도 추잡한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육체를 가진 동정녀라면 말할 것도 없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특히 이 피에타가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가 남긴 수많은 조각들 중에서 그의 서명이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어깨띠를 보면 ‘MICHAEL·ANGELVS· BONAROTVS·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세계적인 걸작이다 보니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결국 1972년 5월 21일 헝가리 출신의 지질학자 라
슬로 토트가 “내가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외치며 10여 차례나 망치를 휘둘러 성모의 얼굴과 한쪽
팔을 박살내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전문가들이 바닥에 흩어진 작은 부스러기까지 수거해 7개월만에 복원했지만, 이후로는 방탄유리에 둘러싸여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다. 이 때문에 피에타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보관된 수많은 예술품들 중 유일하게 방탄유리의 보호를 받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성베드로성당을 구경하고 나왔다.
꼭 봐야할 미켈란젤로의 피체타상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탓도 있지만 공부가 부족했고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사진을 정리하며 새삼 느낀 건 성당 내부에 붙은 먼지 하나까지 그냥 넘길게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당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미켈란젤로의 돔 Cupola, 교황의 제대와 발다키노 Baldacchino, 성 베드로 의자를 보았으니 10% 정도 보았을 거라 위안해 보지만 실은 0.1%도 채 보지 못한 것 같다.
결국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성베드로성당을 찾은 자신이 한심하다는 이야기다.
↓↓바티칸 근위병 - 복장 디자인을 미켈란젤로가 했다지요.
가기 전에 이 자료만 확보했더라도 1%는 보고 오는건데....ㅠㅠ
필자보다 뒤에 찾을 누군가를 위해 자료을 올려둡니다. 다운받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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