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城門).
1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99.27㎡), 2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39.45㎡)의 중층문루(重層門樓) 팔작지붕 겹처마문. 보물 제308호. 전주부성(全州府城) 4대문 중 남문(南門)이다.
전주부성은 고려 말 도관찰사(都觀察使) 최유경(崔有慶)이 축성하였다는 내용이 1734년(영조 10)에 이 부성을 대수축(大修築)한 관찰사 조현명(趙顯命)의 기록에 보인다.
수축 당시 남문은 3층 문루(門樓)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부르고, 동·서·북문은 2층으로서 각각 판동문(判東門)·상서문(相西門)·중차문(中車門)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다 한다.
그 뒤 1767년의 대화재로 남·서 두 문이 소실되자, 이해 9월에 도임(到任)한 관찰사 홍낙인(洪樂仁)이 중건하여 풍남문·패서문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것은 홍낙인의 풍남문 상량문(上樑文)으로 보아 한고조(漢高祖)의 향리(鄕里) 이름인 ‘풍패(豊沛)’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풍남문 양측에는 포루(砲樓)와 종각(鐘閣)이 있었다 하는데, 1980년 정비공사에서 옹성(甕城)과 함께 복원되었다. 이 문은 화강암으로 문루를 쌓고 기부(基部)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는 2층 문루를 올려세웠다.
1층과 2층의 평면이 달라 평면 규모가 갑자기 줄어드는 특이한 형상이므로 원래는 3층으로 설계했던 구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기부의 무사석(武沙石 : 층을 지어 높이 쌓아 올린 축석)은 성벽돌 쌓듯이 네모진 큰 돌을 쌓아 맞추고 홍예석 정상부에 마감돌을 얹은 점이 특이하다.
문루 주위에는 벽돌로 여장(女墻)을 둘렀으며, 그 양쪽에는 일각문(一角門)인 협문을 두어서 밑에서부터 계단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아래층은 내부에 전후 두 줄로 4본씩 세운 고주(高柱)가 그대로 연장되어 상층의 변주가 되도록 하여 상층에서 건물 너비가 갑자기 줄어드는 모양이 된다.
이러한 가구(架構)수법은 다른 문루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이다. 아래층 내부 한편에는 목조계단이 있어 위로 오르게 되어 있고, 상층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기둥 상부는 창방(昌枋)만을 돌리고 그 위에서 주심포(柱心包) 형식과 같이 공포(栱包)를 짰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귀면(鬼面)·화병·수상(獸像)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된 화반(花盤)이 놓였고, 아래층 전후면 중앙칸 기둥 위에 용의 머리를 조각한 초공(初栱)이 놓여 외부로 뻗었으며, 귀포의 귀한대〔隅限大〕에도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쇠서는 다포집 계통의 앙서(仰舌)와 수서(垂舌)를 보이며, 앙서 위에는 연봉이 조각되었고, 첨차는 당초(唐草)문양을 조각한 쌍S형 첨차와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혼용하였다.
공포의 수법은 조선 후기의 복잡한 조각을 보이고 있으며 상당한 기교와 재치가 있다. 2층 상부에는 반자 없이 연등천장〔椽背天障〕을 하고 기둥 사이에는 판문을 달았다.
2층루의 남면에 ‘豐南門’이라는 편액이, 북쪽에는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편액의 글씨는 1842년(헌종 8)에 부임한 감사(監司) 서기순(徐箕淳)이 쓴 것이라 한다.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3.04.20
전주시 완산구 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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