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늦깍이 서유럽기행 #15 이탈리아/로마/콜로세움 원형경기장 Anfiteatro Flavio - Colosseo
5월 1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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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 원형경기장 Anfiteatro Flavio - Colosseo
고대 로마인들의 뛰어난 건축공학 기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세우기 시작해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완성시킨 4층의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nfiteatro Flavio)이다. 장축지름은 187m이고 단축지름은 155m, 둘레 527m, 높이 48m의 타원형 건물이다.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각 층마다 양식을 달리했으며 외벽은 아치 80개가 둘러싸고 있다. 본래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의 인공연못이 있던 자리를 덮고 만들었다고 한다.
신분과 성별에 따라 1층의 가장 낮은 곳에 설치된 특별석에는 황제와 베스타 여신이 마주하고, 그 옆으로 흰 토가(로마 시민의 겉옷)를 입은 원로원, 2층에는 귀족과 무사, 3층에는 로마 시민권자, 4층에는 여자·노예·빈민층이 자리 잡았다. 한 번에 5만 명이나 되는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로마인들은 치열한 검투사의 격투 시합, 맹수 등의 사냥 시합 등 목숨을 건 잔인한 전투 경기와 모의 해전(이를 위해 경기장에 물이 채워졌다) 등을 즐겼다. 티투스 황제는 준공을 기념한 100일의 축제 기간 동안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운동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해 보여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검투사가 되면 이득도 있었다. 다른 노예들보다 생활환경이 훨씬 나은 군대식 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결이 끝나면 승자는 패배한 검투사를 죽여야 할지, 혹은 용맹함을 보여 주었으니 살려야 할지에 대한 관중들의 결정ㅡ혹은, 황제가 그 자리에 있다면 황제의 결정ㅡ을 살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한, 엄지손가락을 올리거나 내리는 제스처를 통해 이러한 결정이 내려졌다. 시합에 들어가는 사자, 표범, 악어 등의 맹수는 극장 아래에 있는 우리에 가두었다가, 로프로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경기장에 풀려났다. 이 경기장에서 경기를 했던 검투사들은 전쟁 포로들로 시합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두면 자유의 신분을 다시 얻을 수 있었다.
콜로세움은 햇빛이 강할 때나 비가 올 때 벨라리움(Velarium)이라는 천막 지붕을 설치해 하늘을 가렸는데 천장 가운데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벨라리움으로 콜로세움을 덮는 작업은 고도의 공학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다. 경기장 바닥에는 나무 바닥을 깔고 그 위에 모래로 덮었는데 원형경기장을 이탈리아어로는 아레나(Arena)라고 한다. 이는 라틴어의 ‘모래’를 뜻하는 아레나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경기장 바닥이 파헤쳐져 있지만 옛날에는 지하실 위에 덮개를 씌워 그 위에서 경기를 했고 바닥 밑에는 지하실을 만들어 칸을 막고 검투사들의 대기실과 맹수들의 우리로, 그리고 경기 시 필요한 도구들의 보관 창고로 사용했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그 앞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의 이름인 콜로소(Colosso)에서 와전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Colossus’, 즉 거대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217년 화재, 442년에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에는 성당 건물들이나 귀족들의 저택을 짓기 위한 건축자재와 대리석의 채석장이 되어 파헤쳐지기도 했다. 1744년 베네딕트 교황 14세는 이곳에서 순교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신성시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실상 콜로세움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거의 죽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에 콜로세움은 교회로 쓰였으며, 그 후에는 저명한 두 로마 가문인 프란지파네(Frangipane) 가문과 안니발디(Annibaldi) 가문이 요새로 쓰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진의 피해를 입거나 강도가 돌을 약탈해 가기도 하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대의 공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콜로세움은 여전히 잔혹한 여흥을 즐기는 인간의 취향을 반영하는 기념물로 남아 있다. [출처: http://somgle.tistory.com/388 / 솜글]
↓↓콜로세움을 반쯤 돌며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이해를 됩기 위한 자료 화면
↓↓나우마키아(naumachia)는 고대 로마에서 있었던 대규모 모의해전(模擬海戰)를 일컫는다.
콜로세움에서도 경기장에 물을 채우고 이러한 모의해전을 벌였다고 한다.
나우마키아는 이후에도 이어져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종류의 수상 스펙터클이 상연되었다.
그림은 콜로세움이 세워지기 전 그 터에 있었던 인공호수에서 네로황제가 즐기던 모의해전 놀이 모습으로 17세기에 제작되었다.
↓↓콜로세움을 복원한 모습
↓↓콜로세움의 내부 모습을 재현한 그림
모자이크 그림을 보면 같은 팀에 속한 검투사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로마시민들은 인기가 높은 검투사들의 이름을 외우고 환호하며 그들에게 팬레터를 보내기도 했다.
참고자료
·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 정태남 | 21세기북스
· http://somgle.tistory.com/388 [솜글]
· ENJOY 유럽 | 문은정 외 | 넥서스
· 세계 불가사의 여행 | 현암사 편집부 | 북카라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