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딱 댕겨온 터키여행 #8] 앙카라에서 지하도시 데린쿠유까지
오늘은 그리도 기대하던 카파도키아를 보는 날이다.
벌써 마음이 설렌다.
카파도키아를 보기위해 13시간을 달려가는데 날씨라도 좋아야 할텐데....
지도를 확인해보니 앙카라에서 지하도시가 있는 데린쿠유까지는 309키로미터 3시간 30분가량 소요된다고 나온다.
새벽 6시 30분에 호텔을 출발 앙카라시내에 있는 한국공원과 아타튀르크의 묘를 차창으로 조망하고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달릴 것이다.
말로만 듣던 수동으로 문을 열고 닫는 승강기를 보유한 오래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에 호텔앞을 한바퀴 돌았다.
호텔 근처 5거리에서 터키 건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 동상도 어둠속에서 보았다.
아타튀르크는 여행 내내 곳곳에 동상이 세워진 것으로 봐서 터키의 영웅임이 틀림없다.
이동중 가이드가 소개한 아타튀르크 이야기를 모두 기억할 수 없어 백과사전 자료를 빌어 다시 한번 복습하고 가야하겠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터키어: Mustafa Kemal Ataturk]
1881년 5월 19일 ~ 1938년 11월 10일)는 터키의 육군 장교이자 혁명가, 작가 그리고 터키 공화국의 건국자 이고,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타튀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육군 장교였고, 오토만 제국의 패배 이후 터키 국민 운동 소속으로 터키 독립 전쟁을 주도하였다.
일찍이 청년 투르크 당에서 활동하였으며, 갈리폴리 전투 때 영국과 프랑스 군대의 공세를 저지한 탁월한 장군이기도 하였다.
재임 기간 중 1938년에 서거했다.
<유년시절>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881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그리스의 살로니카(지금의 테살로니키)에서 국경세무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집은 현재 테살로니키 시에서 터키 정부에 기증해 아타튀르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다른 형제도 있었지만, 여동생인 마크불레 아타단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었다. 앤드류 망고는 그의 가족들은 터키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었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알리 리자는 알바니아인라는 설이 있지만, 터키의 역사학자들은 그의 조상이 터키 아이딘 주의 쇠케에서 이주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 쥐베이데 하듬은 터키의 소수민족인 외뤼크 계열이라고 알려져있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은 그의 어머니가 슬라브족의 피도 일부 섞였다고 주장한다.
마케도니아에 위치한 아타튀르크의 할아버지의 복원된 생가아타튀르크의 어린시절 이름은 무스타파였으며, 케말(Kemal)은 그의 수학 선생님이던 위스퀴프뤼 무스타파 에펜디가, 그의 수학 실력과 성숙한 모습을 칭찬하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종교학교에 다니길 원했지만, 무스타파는 종교와 무관한 사립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의 부모는 무스타파가 무역상이 되길 원했으나, 그는 부모와 상의 없이 1893년에 살로니카 군사 학교에 입학하였다. 1896년에는 마나스트르 군사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899년 3월 14일에는 오스만제국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며, 1902년에 졸업했다. 1905년 1월 11일에는 오스만제국 군사대학을 졸업했다.
<군인시절>
초창기 경력
졸업 후, 무스타파 케말은 반독재주의자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몇 달동안 구속되었다가, 전 학교 교장이던 리자 파샤(Rıza Pasha)의 변호로 출소했다. 출소 이후 그는 다마스쿠스에 위치한 오스만제국 5군 사령부의 대위로 임관한다. 그는 압둘 하미드 2세에 대한 독재를 반대하여 청년 비밀결사 단체인 조국과 자유라는 단체에 가입했다. 1907년 6월 20일에는 시니어 캡틴으로 진급했으며, 같은해 10월 13일에 마나스트르에 위치한 3군 사령부로 전속되었다. 그 후 통일진보위원회에 가입했다. 1908년 6월 22일에는 동부 루멜리아의 오스만 제국 철도 감독관으로 임명됐다. 같은해 7월 청년 튀르크 혁명에 가담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군의 비정치화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결과 현재의 리비아 지방인 트리폴리타니아 빌라예트로 부족 반란을 진압하는 한직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미쿠쉬(Mikush)에 따르면 무스타파 케말이 자원해서 떠났다고도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1909년 1월에 이스탄불에 다시 돌아왔다.
1909년 4월에 이스탄불에서는 군인들에 의해서 반혁명 운동인 3월 31일 사건(31 Mart Vakası)이 발생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반혁명 운동을 진압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10년 9월 프랑스 피카르디1910년에는 오스만 제국령 알바니아로 발령받아서 전속됐다. 그 당시 알바니아에는 이사 볼레티니가 코소보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무스타파 케말은 알바니아의 정치인 에퀴렘 블로라(Eqerem Vlora)를 만났다. 1910년 가을에는 오스만 제국의 관전장교의 신분으로 프랑스 피카르디에서 있었던 대규모 훈련에 참여했고, 1911년에는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제국 전쟁부(Harbiye Nezareti)에서 잠시 복무했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무스타파 케말은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현재의 리비아)에 발령받았다. 그 곳에서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고, 주로 벵가지, 데르나, 투브루크에서 이탈리아 군 약 150,000명을 베두인 약 20,000명과 튀르크인 8,000명으로 맞서 싸웠다. 이탈리아가 선전포고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리비아로 파병된 오스만 제국군은 오스만령 예멘에서 예맨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서 차출되어 있어 병력과 물자가 부족했다. 그리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오스만 제국군이 이집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했고,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군은 아랍인처럼 위장하고 이집트]를 통과하거나, 배를 이용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로 파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때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서 큰 공을 세웠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연합국들이 오스만 제국을 침공할 때 전선에 나가 조국을 수호했다.
특히 1921년에는 그리스가 아나톨리아를 침공할 때, 사카르야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어 대그리스주의를 끝내게 만들었다. 1923년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청년 장교들과 함께 앙카라를 장악하여 오스만 제국을 무혈로 멸망시켰다.
1922년 11월에는 술탄제를 폐지하고, 1923년 7월 연합국과 새로운 조약(로잔 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에는 앙카라를 수도로 삼고 공화제를 선포하였으며,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시절>
케말 아타튀르크는 1923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본격적으로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1924년에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터키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터키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자료 : 한국어위키백과사전]
5거리 코너에 위치한 터키국영은행 경관조명이 새벽까지 켜져있다.
수동으로 문을 여닫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바로 그 호텔....사진의 우측 하얀 버스옆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넋을 기리기위해 만들어진 한국공원....우리 정부가 기증했다고 한다.
한국공원 바로 옆에 얼마전 폭탄터러로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던 앙카라 기차역이 위치한다.
이제 3시간 반동안 허허벌판을 달린다. 가도가도 같은 풍경이다.
사진은 소금호수 터키에서 2번째로 크다는 소금호수. 겨울철이어서 소금 채취는 하지않느다고 한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차창에 비친 풍경은 불모지처럼 보이는 광활한 산과 들판이다.
어제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너며 큰 물줄기를 보고 지금까지 작은 물줄기조차 본적이 없다.
강수량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바로 땅속으로 스며들어서인지....
가이드 말에 의하면 강수량이 적지는 않고 지하수가 풍부하다고 한다.
여름에는 소금호수 주변에 소금이 하얗게 결정을 이룬다는데 겨울철 우기에는 그냥 물만 보이는 호수다.
들판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양떼를 종종 볼 수 있다. 말라빠진 풀에 무슨 영양가가 있을까? 양들도 먹고사는데 고생이 많아 보인다.
그나마 설화가 지친 여행객의 안구를 정화시켜준다.
박토여서인지 나무도 거의 볼 수 없다. 그나마 자라다 말라버린듯한 잡초가 흑먼지를 막아준다.
과연 이런 땅에서 무엇을 먹고 사는지 아직도 굼금증이 풀리지 않는다.
도로를 개설하면서 절개한 절개면을 보면 농사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표토층 바로 아래에 돌 아니면 마사토같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쉰 시간을 함쳐 4시간만에 지하도시가 있는 데린쿠유(DERINKUYU)에 도착했다.
2015.12.17.
앙카라-데린쿠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