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칼-모로코 여행 #37-파티마에서 스페인 살라망카 [Salamanca]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포르투갈을 맛보고 다시 에스파냐(스페인)의 대학도시 살라망카로 향한다.
오늘은 살라망카 관광 두어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차에서 보내야하니 편안한 차안에서 기운을 충전해야 한다.
파티마에서 살라망카까지 4시간, 살라망카에서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까지 3시간이 걸린다니 합쳐서 7시간이다.
다행히 고속도로 상태도 좋고 차량이 편안해서 장시간 이동에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지만 아까운 시간을 차창관광으로 대신해야 한다는게 안타깝다. 그러나 여행이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즐기는 자의 몫이니 나름의 방법대로 즐기자.
차에 오르니 밀로스 포먼이 2006년 감독한 '고야의 유령(Goya's Ghosts)'을 상영해 준다.
이 영화는 화가 고야의 작품세계를 그린 영화라기 보다 고야가 살던 시대상을 고야의 눈으로 그려낸 역사 영화로 보인다.
영화의 개략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거인 (공포)’, ‘이것은 더 고약하다’
궁중화가 고야의 아름다운 모델이자 영원한 뮤즈 이네스는 부당한 누명을 쓰고 종교재판소에 갇히게 된다. 이네스의 아버지인 부유한 상인 토마스는 딸을 구하기 위해 성당 재건 비용 기부 등 백방으로 노력한다. 이를 구실로 고야와 로렌조 신부를 집에 초대한다.
이네스가 부당한 심문에 자백 한 사실을 듣게 되고, 토마스는 어이없는 강변을 늘어놓는 로렌조를 심문한다. 로렌조에게 종교재판소를 모독하는 강제 고백의 고해문서를 받아낸 그는 심문의 고통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허위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이리하여 구원은 없다’
이네스를 찾아간 로렌조는 갑작스레 안개가 낀 듯 모호하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자신의 욕망을 느끼고 아름다운 이네스를 겁탈한다.
토마스는 로렌조의 고해문서를 왕에게 보고한다. 이에 종교재판소는 로렌조의 지위를 박탈, 스페인에서 추방한다. 세월은 20여 년이 훌쩍 지나 프랑스 혁명으로 스페인은 격동의 시대를 맞는다. 나폴레옹의 점령이 시작되기 직전 고야는 청력을 완전히 잃고, 정신은 황폐화 되지만 눈으로 보이는 너머의 것을 그리기 시작한다.
로렌조는 나폴레옹 정권의 핵심 간부가 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오고 종교가 아닌 이성과 혁명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야망을 품는다. 로렌조는 종교재판소를 기소하고 갇힌 사람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이네스 역시 감옥에서 나오지만 가혹한 고문과 기나긴 시간은 고야의 뮤즈 이네스의 아름다움과 생기를 앗아갔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가족을 비롯해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 의지할 사람은 힘없고 늙은 고야뿐이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이네스는 감옥에 있는 동안 딸을 낳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리고 고야는 이네스의 딸 알리시아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수녀원을 뛰쳐나간 알리시아는 우여곡절 끝에 거리의 여자가 된다. 이 때 고야는 알리시아가 로렌조의 딸임을 알게 되고, 로렌조는 딸의 존재가 자신의 야망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마드리드의 모든 창녀들과 함께 알리시아를 해외로 보낸다. 이네스와 알리시아 두 모녀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어느새 자신의 소명이 되어버린 고야.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네스와 그녀의 딸은 끝내 상봉하지 못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시대가 저물며, 또다시 로렌조에게는 위기가 닥쳐 오는데…<자료:Daum>
멋쟁이 기사양반도 백미러로 보입니다.
갈 길이 머니 아침 일찍 서둘러 호텔을 출발해 고속도로로 접어든다.
간간이 비를 뿌려 피곤한 몸을 편히 쉬게 한다.
밤이되면 시차에 관계없이 골아 떨어지고 여행길에 나서면 눈이 반짝거리는걸 보면 아무래도 여행가를 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행중 그 많은 시간을 차 안에서 또 비행기 안에서 보내면서 밖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잠을 잔적이 없는것 같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물안개가 피어올라 아름다운 장면들이 차창 프레임에 슬라이드처럼 스친다.
아침 식사 나온 양떼도 보이고
푸른 초원 위에 간간이 키가 제법 큰 나무도 보인다.
휴게소에 들르는걸 보니 벌써 두시간을 달려온 모양이다.
이 휴게소 역시 작지만 깔끔하다. 주유 시설을 꽤 큰데 차가 없어 하루 종일 몇대나 주유하는지....
휴게소에서 본 포르투갈의 겨울풍경
휴게소를 출발 조금 달리니 설산이 보이고 설산 아래로 그림같은 동네들이 이어진다.
모로코, 스페인, 포르투갈을 여행하면서 가장 이해가 안가는 것은 중세 이전에는 역사적인 배경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도 높은 곳에 동네가 형성된 점이다. 이 나라들이 강수량이 적어 물을 구하기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동북쪽에 높은 산이 모여있고 서남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다.
강수량 역시 동북쪽이 많고 서남쪽은 적은 편이어서 큰 나무가 자라기 쉽지않다고 한다.
스페인에 가까워지니 상수리나무가 많이 보인다. 스페인 특산품 하몽은 바로 상수리 열매(도토리)를 먹고 자란 돼지란다.
방목하는 돼지가 상수리나무 아래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먹고 자란다느데 가장 고급품이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국경마을로 접어든다.
국경선 통과 게이트다. EU협정 전에는 여기서 출입국 절차를 거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냥 통과한다.
스페인 땅이다.
초지도 포르투갈에 비해 정비가 잘 된듯 하다.
분위기있는 사진이 한 장 나올만한 장소인데....
스페인으로 접어들어 한시간 남짓 달려 점심을 먹기위해 들른 작은 규모의 도시다.
도시 이름을 물어보긴 했는데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다.
이 도시도 군데군데 중세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건물과 성터 등이 보인다.
묘한 형상으로 전지한 까페앞 나무가 그림자와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고 있다.
바로 이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홍콩주가(리스토랑 홍콩)이라 간판이 되어있다. 오랜만에 쌀밥을 먹었을뿐 맛은 그저 그렇다.
도로변에 설치해둔 벤치다. 나이가 제법 들어보인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나이가 제법 된듯.
다시 고속도로를 달린다.
도로변 풍경이 잠을 청하기에는 너무 어까워 나만의 관광법으로 즐긴다.
살라망카에 접어든다고 한다. 신 주택지 개발을 위해 말끔히 가로를 정비하고 조경까지 마친 신흥 주택단지를 통과한다.
아직은 고도다운 느낌은 전혀 없다.
살라망카 시내로 접어드는 첫번째 로터리에 접어들자 조형물과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살라망카는 중세시대부터 교육도시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이어서 무리지어 다니는 학생들이 많이 보인다.
거리 까페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보이고
현대식 건축물도 보인다.
살라망카 [Salamanca]
스페인 중서부 카스티야레온 지방 살라망카 주의 주도.
토르메스 강 북쪽 기슭의 해발 778m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스페인에서 가장 유서 깊고 예술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이베리아인들의 주요정착지로서 BC 217년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의 침략을 받았다. 이 도시(살만티카)와 그 다리가 아스토르가와 세비야를 잇는 '실버 로드'상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도시가 들어섰다. 무어인들의 통치기간중에는 주교가 오비에도에서 살았지만 7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시가 주교관구의 지위를 얻었다. 8~11세기에 그리스도교도들과 무어인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1087~1102년에 그리스도교도들이 다시 이주해왔다. 1178년 레온의 페르난도 2세가 이곳에서 의회를 소집했으며, 왕국에서 2번째로 이곳에 푸에로(특권)를 칙허했다. 알폰소 9세가 통치하던 1218년에 살라망카대학교가 세워졌다. 1570년 아빌라의 성 테레사가 카르멜리테 수녀원을 세웠다. 스페인 내란(1936~39) 때 프랑코 장군이 이곳의 주교관저에서 살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구(舊)대성당(1140경 착공)과 신(新)대성당(1513 착공, 18세기 완공)을 비롯하여 유서 깊고 훌륭한 유적들이 많이 있다. 신대성당 맞은편에 있는 대학교의 본관(1415~33)은 플래터레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서쪽 정면(1494)으로 유명하다. 근처에 이 대학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총장이며 학자이자 작가였던 미겔 데 우나무노의 관저가 있는데, 이곳에는 그의 서재와 개인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신대성당의 남쪽에는 호세 마메르토 에르모시야에 의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과학·철학·문학 등의 학부로 이루어진 콜레히오데아나야(1760~68)와, 기숙사가 딸린 옛 대학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콜레히오데폰세카(1527~78)가 있다. 콜레히오데폰세카는 반도전쟁(1808~14) 이후 아일랜드에 양도되어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신학교로 사용되어 콜레히오데로스이를란데세스로 널리 알려졌다. 법학부는 대학교에 인접해 있고 새로 생긴 의학부는 강 서쪽 유역에 있다. 1950년대에 3개의 기숙대학이 이 도시에 설립되었는데, 스페인에서 이러한 형태의 교육기관으로는 처음이었다.
옛 예수회 신학교(1617~1755)는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목사나 신학도들인 교황청립대학교가 되었으며, 라클레레시아 교회는 지금도 예수회의 예식처로 쓰이고 있다. 이밖에 호세 데 리베라가 '성모 마리아의 무원죄 잉태설'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녀원의 이탈리아풍 교회(1636~87),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86년 신학자 공의회로부터 여러 번 심사를 받았던 수녀원이 남아 있는 것 중 보다 오래된 유물로 되어 있는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산에스테반 수녀원 겸 교회(1524~1610),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된 켄터베리의 성토마스 교회(15세기에 복구), 12세기의 산마르틴 교회 등도 뛰어난 유적들로 꼽힌다.
회랑이 있는 아름다운 마요르 광장(1729~33, 알베르토 데 추리게라가 설계하고 안드레스 가르시아 데 키뇨네스가 완공시킴)은 지금도 이 도시의 중심지이다. 처음에는 투우장으로 가끔 사용하기 위해 지은 이 광장은 스페인의 역대 왕들과 프랑코 장군의 큰 메달이 양쪽에 장식되어 있는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알베르토 데 추리게라가 설계한 시청사도 있다. 비종교적 유적들로는 아치 중 15개가 로마 시대에 세워진 로마 시대의 다리, 거의 도시성벽 유적지로 되어 있는 토레델클라베로(1480경), 옛 산시프리안 교회의 폐허가 된 지하실에 있는 전설적인 살라망카 동굴, 벽이 가리비의 조가비로 만들어진 조각물과 탈레베나 말도나도 재상이 소유했던 무력에 의한 산티아고 칙령의 상징물로 뒤덮여 있는 16세기의 카사데라스콘차스 등이 있다. 시 동쪽으로 19㎞ 떨어진 마타칸에는 공군기지가 있다. 농업 중심지(곡물)이며 공장이 몇 개 있으나, 관광업이 경제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자료:브리태니커>
차에서 내린 곳은 살라망카의 유명한 광장 '마요르' 근처다.
시장 구경겸 저녁 파티 안주거리 하몽, 과일을 구입하기 위해서 시장에 들렀다.
돼지를 가공한 제품들을 판매하는 가게
통 새끼돼지도 보인다.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하몽 다리 하나에 99.9유로(우리돈 약 15만원)이면 비싼편은 아닌듯 하다.
과일과 야채가게에 무우와 배추만 보이지않고 다른건 모두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