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포르투칼-모로코 여행 #22-꼬르도바 '유대인 거리 산책'
코르도바 역사지구 '유대인거리' 산책
그라나다에서 코르도바까지 3시간 가량 시원하게 뚤린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끝도없이 펼쳐진 올리브나무.
올리브나무를 신이 내린 나무라 한다고....
세계 올리브 총 생산량의 30%를 넘게 스페인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코르도바(CORDOBA)
코르도바 시 (스페인어: Córdoba, 아랍어: قرطبة)는 스페인의 시로서 코르도바 주의 주도이다. 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있으며 고대 로마 시대 때부터 도시가 형성됐다. 2007년 기준 인구는 323,600명이다.
오늘날 코르도바는 대도시는 아니지만 오래된 유적이 산재하고 있는 문화의 산실이다. 오래된 구도심에는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나 코르도바는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때에 수도의 구실을 했으므로 이슬람과 스페인 후대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다.
10세기까지만 해도 코르도바의 인구가 5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서유럽과 세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인구면에서 뒤지지 않는 도시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세의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그 유려함으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히스파니아 베티카 속주의 주도였다. 지금도 로마 신전과 다리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그 후에는 서고트 왕국 지배하에 들어가고, 6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된 적도 있다.
711년,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다. 756년에 성립된 후우마이야 왕조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았는데, 그 중심지는 메스키타(스페인어: Mezquita, 스페인어 일반명사로 모스크를 의미하나, 고유명사로서는 코르도바의 모스크를 지칭함)였다. 10세기에 아브드 아르라흐만 3세(Abd ar-Rahman II)와 알하캄 2세(Al-Hakam II)의 치세 때가 전성기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40만에서 100만 권에 이른다는 장서를 자랑하는 대도서관이 세워져 수많은 학자들이 활약하여, 톨레도와 함께 서방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손꼽혔다.
크리스트교 세력에 의한 레콩키스타(국토회복운동)가 전개됨에 따라, 1236년 6월 29일,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에게 정복당했다. 15세기 말,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자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소되어, 메스키타도 가톨릭교회로 개조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철학자 세네카와 루카누스, 중세 시대의 철학자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와 모세 벤 마이몬(마이모니데스)등이 코르도바 출신이다.<자료:위키백과>
코르도바 역사 지구
코르도바 역사 지구는 현재 모스크-대성당 주변에 있는 모든 블록 내의 주택과 기념물 주변 거리, 그리고 이 거리에서부터 넓게 펼쳐진 구획된 토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남쪽으로 과달키비르(GuadaIquivir) 강의 먼 제방[로마 양식의 다리와 성(城)을 포함]까지, 동쪽으로는 산 페르난도(San Fernando) 거리, 북쪽으로는 상업 중심지의 경계까지 확장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알카사르와 산 바실리오(San Basilio) 거리를 포함한다. 그 범위와 설계 면에서, 그리고 이곳에 존재했던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이 표현된 기념물들의 역사적인 중요성 덕분에 이 도시는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코르도바의 지리적 특징은 두 가지로 정의되는데 광물 자원이 있는 시에라 모레나(Sierra Morena) 산맥과 이 산맥을 에워싸고 흐르는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교역과 방어’라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인간이 정착하게 된 지역 유적이다.
이 지역의 초기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융성했던 카르타고의 거주 지역이었다가 도시의 전략적・상업적 중요성을 알아차린 로마인이 기원전 206년에 이곳을 점령하고 이스파니아(Hispania; 로마 인들이 사용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옛 이름) 속주(屬州), 즉 바에티카(Baetica; 고대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에 설치한 3개 자치주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 도시는 미려한 공공건물과 개인 가옥이 경관을 형성했고, 독특한 요새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곳 출신의 유명인으로는 2명의 세네카(Seneca)와 시인 루칸(Lucan)이 있다. 6세기에 이방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이베리아 반도[Iberian peninsula]의 로마 사회는 흔들렸고, 코르도바는 서(西)고트 족에게 함락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것이 파괴되었지만 코르도바는 서고트 족의 지배 아래 도시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711년에 코르도바는 과달레테(Guadalete)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타리크 이븐 자위드(Tarik-ibn-Zayid)가 이끄는 무어 인 정복자들에게 처음으로 점령당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압달라만 1세(Abd-al-Rahman I)가 756년에 다마스쿠스의 칼리프 지위에서 물러난 뒤, 코르도바에 자신의 왕궁을 건립하면서 이 도시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는 786년에 로마의 야누스 사원이 있던 자리에 대(大)모스크를 건설했는데 훗날 서고트 족에 의해 다시 교회로 변경되었다. 그는 다마스쿠스의 모스크보다 더 빛나는 구조물을 세우려 했으며, 이 작업은 2세기에 걸쳐 계속되었다. 코르도바는 예술과 지식의 탁월한 우월성을 지니고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하게 용인해 주면서 거대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위용을 보자면 코르도바는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의 장관에 필적하는 300채 이상의 모스크와 수많은 궁전, 그리고 공공건물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칼리프가 다스리던 지역은 1009~1031년의 격렬한 내전 이후에 붕괴되었으며, 대모스크만이 번영했던 시절의 상징물로 남게 되었다. 아노라비드(Ahnoravid)가 권력을 계승하고, 그 결과 12세기 코르도바에 아우오아드(Ahuohad) 왕조가 들어서면서 알 안달루스(Al-Andalus)의 수도로 삼아 이전의 영광을 대부분 복구했다. 도시의 지성적인 면모는 아베로에스(Averroes; Abu Walid-ibn-Rusch)와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Musa-ibn-Maymun)와 같은 위대한 학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236년에는 페르디난드 3세가 코르도바를 점령했고 도시는 다시 기독교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모스크는 대성당으로 바뀌었으며, 빈번한 무어 인의 공격 위협을 막아내는 국경 도시라는 역할에 걸맞게 알카사르와 칼라오라 탑 사이에 새로운 방어 구조물을 높이 쌓았다. 모스크-대성당이 주변에 밀집한 이 역사적 중심지는 특징적인 좁고 구불구불한 거리와 함께 중세 도시의 구조를 상당 부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걸친 기독교 지배를 재건하면서 코르도바는 그 정치적・지성적 중요성이 많이 떨어졌다. 하지만 시에라모레나의 구리 광산이 부근에 있었기에 상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의 지배는 일찍이 지나갔지만 그 시대의 증거는 분명히 남아 있다. 유속이 빠른 과달키비르 강에 가로질러 놓인 3.7m의 다리가 그 예이다. 1세기 무렵에 사원의 기둥들과 알카사르의 멋진 모자이크, 로마 양식으로 만든 벽의 단면도 있다. 알카사르의 정원들은 모스크 주변 지역에 무어 양식으로 설계했는데 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점에서 무어-안달루시아 양식 정원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념물이 될 만한 칼리팔(CaliphaI) 목욕탕 유적도 이 부근에 있다. 무어 인이 지배하는 동안 대모스크 주변에는 작은 예배당이 많았다. 그 중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남아 있던 첨탑들은 산티아고(Santiago), 산 로렌소(San Lorenzo) 교회와 산타클라라(Santa Clara)의 은둔처가 되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요한 기념물로는 알모도바르(Almodovar) 문이 있다.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유대인 구역으로 알려진 곳에 무어 양식 코르도바의 중요한 유대인 기념물들과 1492년 유대인 추방 이후 기독교인이 사용한 작은 시너고그(Synagogue; 유대인 회당)가 있다. 알카사르의 기독교 구조물들은 왕족의 거주지로서 14세기 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 건축물들은 무데하르(Mudejar) 양식의 강력한 영향력을 보여 준다. 칼라오라 탑은 기독교 시대의 초입부터 중세 요새의 한 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 하신토(San Jacinto) 교회는 화려한 고딕 양식이다. 이 교회는 오늘날 의회 건물과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무어 양식에 기반을 둔 산 바르톨로메오(San Bartolomeo) 예배당은 이제 고딕-무데하르 양식의 명백한 기독교 건물이 되었다. 산 프란시스코(San Francisco)와 산 니콜라스(San Nicolas)의 교회도 같은 시기에 지은 것이다. 이밖에 중요한 건물들은 16세기부터 건설되었다. 종교적・군사적 용도와 건축 양식을 보여 주는 산 펠라히오(San Pelagio) 신학교, 푸에르타 델 푸엔테(Puerta del Puente; 교량의 문), 파에스(Paez) 가문 저택, 푸엔산타(Fuensanta) 계곡의 마르케스(Marques) 저택 등이다. 18세기부터 출현한 시민 건물로는 ‘성 라파엘(San Rafael)의 개선(凱旋)’과 카르데날 살라사르(Cardenal Salazar) 병원이 있다.
역사지구 주변을 성곽이 두르고 있고, 아래 사진에는 해자였던 흔적인지 물이 담겨져있는 완충 공간도 보인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유대인 거리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하얀색으로 단장한 빼곡한 집들, 좁은 골목을 지나면 곳곳에 아담한 광장이 있고 어김없이 까페가 자리잡고 았습니다.
매년 5월에는 이 골목 집들 정원을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개방하는 시기는 아니지만 한 가정집 정원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게도 꾸며놓았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좁은 골목이지만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볼거리가 많습니다.
유적지에서 발굴된 기둥을 벽에 붙여놓기도 하고 옛날 벽돌로 문앞을 치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골목 집집마다 걸이호문에 화초를 심어놓아 좁은 도로를 삭막하지 않게 합니다.
유대인의 종교모임 장소인 Sinagoga입니다.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좁은 길에도 작은 차가 다닙니다. 사람은 남의 대문으로 대피해줍니다.
여기도 Sinagoga가 있군요.
국기가 게양된 것으로 보아 공공기관인듯 합니다.
조금 넓은 골목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 있습니다.
교회도 보입니다.
누구의 동상인지는 듣긴 했는데 기억하기는 어렵군요. 발은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합니다.
하도 만져서 발 끝이 윤이 납니다...ㅎㅎ
유대인 자치체 공공기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나타나는 예쁜 정원과 가게들이 눈길을 끕니다.
길 바닥도 예술입니다.
유대인 추방령이 내려진 1492년까지 유대인이 조성하여 살았던 역사의 현장을 헐어내지않고 잘 보존하고있어 지금 시간여행을 즐기는 중입니다.
한 때 태양이 지지않는 나라 스페인의 가장 큰 실수중 하나가 유태인을 몰아낸 일이라 합니다.
유대인은 한마디로 준비된 사람들입니다. 스페인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랍들 이었지요.
만약 유대인을 몰아내지 않았다면 지금 미국이 누리는 세게 경찰국가의 지위를 스페인이 누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아저씨도 유명한 분이라서 밤낮 여기를 지키고 있겠지요?
기념품 가게와 까페 그리고 작은 꽃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눈여겨보면 곳곳에 유적지에서 발굴한 조각품(골동품)을 벽에 장식으로 사용하거나 기둥의 일부로 사용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답니다.
이 골목에서 휴식과 화장실은 기념품가게를 이용합니다.
골목을 돌며 두어번 기념품가게 신세를 졌지요.
상당히 넓은 광장도 보입니다.
바로 우측이 조금 후에 관광하게 될 메스키타입니다.
갓난 아기를 태운 유모차, 담배를 손가락에 든 부부의 모습을 통해 이들의 생활상을 봅니다.
전문음식접인듯 합니다.
아래 메뉴에 'Tapas"라고 씌여있고 무엇인가 잔뜩 적혀있네요.
타파스(Tapas)는 에스퍼냐에서 주요리를 먹기 전에 작은 접시에 담겨져 나오는 전채요리를 말합니다. 간식으로 먹기도 합니다. 요리방법과 종류는 매우 다양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오징어튀김, 문어튀김, 소시지치즈스틱, 치킨부리 등이 있습니다. 셰리주를 곁들여 먹기도 한답니다.
좁은 골목에도 담배 재털이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반원형의 통을 벽에 부착해 두었습니다.
좁은 골목 사이로 메스키타 종탑이 보입니다.
건물사진 찍기란 쉬운게 아니더군요.
며칠 같은 사진을 찍다 보니 조금씩 요령이 늘더군요. 케다란 건물을 가까이에서 왜곡없이 찍는 방법은 건물의 특징만 살려 찍는 것입니다.
좁은 꽃길과 종탑이 잘 매칭되지요?
유대인들이 이용하였던 '카르데날 살라사르' 병원입니다.
좁은 골목에 호텔과 레스토랑이 즐비합니다. 여기에 하루쯤 묵으며 미로에서 길도 잃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카톨릭교회인듯....
제법 화려한 상점가도 품고 있군요.